KUSF

KUSF

대학스포츠 뉴스 생생한 대학스포츠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대학스포츠 뉴스

[SPORTS KU 2026년 3월호] 대한민국 축구의 첫 페이지, 홍덕영
작성자 SPORTS KU 김태민작성일 2026.04.07 조회 424

 

 

[SPORTS KU=글 김태민 기자, 사진 김은교 기자, 대한축구협회 제공]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최고 성적과 2번의 16강 진출을 통해 지금의 위상을 얻기까진 기나긴 인고의 시기가 존재했다. 1954년 월드컵 최초 본선 진출 이후, 두 번째 진출(1986년)은 32년, 월드컵 첫 승(2002년)은 48년 후에나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암흑기의 고난 없인 황금기의 영광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암흑기’, 한국 축구의 첫 페이지를 펼쳐볼 것이다. 그 도전에 주전 골키퍼로서 함께했던 홍덕영 선생의 이야기와, 처절했던 첫 월드컵의 기억을 SPORTS KU와 함께 살펴보자.

 

 

 

#함흥 청년, 38선을 건너와 고려대학교와 인연을 맺다

홍덕영은 1926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체육사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축구를 접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상경한 그는 생계를 위해 약대에 입학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험 당일 전차를 반대 방향으로 타고 만 그는 우연찮게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의 편입 시험을 보게 되며 고려대학교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전차에서 들었던 보성전문 축구부는 골키퍼가 단점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던 그는 무작정 축구부를 찾아갔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해왔고, 골키퍼와 필드 플레이어를 병행했던 그는 축구부 입단 테스트에 무난히 합격했고, 입단 후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국가대표에 승선하게 된다.

 


 


#평범한 대학생, 올림픽 대표 골키퍼가 되다

그에게 첫 국가대표 해외 원정 경기는 매우 뜻깊은 기억이었다. 1947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펼쳐진 소련의 한 축구단과의 경기였다. 미군의 프로펠러 수송기를 얻어 타 첫 해외 경기에 나선 홍덕영과 대한민국 선수들은 처음으로 태극기가 나부끼는 경기장에서 애국가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대표팀의 후보 골키퍼로서 국가대표로서의 경험을 천천히 쌓아가던 그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첫 메이저 무대(당시 올림픽 축구는 정식 A매치로 인정됐다.)인 1948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다.

단기 대회에서 후보 골키퍼가 직접 경기에 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를 직접 구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부담감 없이 올림픽을 준비하던 그였지만, 주전 골키퍼가 연습경기 중 부상을 당하며 얼떨결에 첫 올림픽을 주전으로 나서게 됐다. 당시 올림픽 축구는 조별 단계 없이 첫 라운드부터 토너먼트로 진행됐고, 첫 상대는 멕시코였다. 멕시코는 1948년 당시에도 이미 프로 리그가 존재했던 강팀이었고, 승산은 거의 없었다. 긴장이 됐던 홍덕영은 수십 년 뒤 멕시코전 직전 마음이 다급해져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런던에서 만들어낸 기적,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로 자리 잡다

첫 국제무대 데뷔전에서, 홍덕영과 대한민국은 위대한 역사를 썼다. 축구계의 변방 중 변방이었던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이 강호 멕시코를 상대로 무려 다섯 골을 득점하며 5-3으로 승리한 것이다. 이 승리로 대한민국은 8강에 진출했고, 이 성적은 2012년 다시 런던에서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무려 64년간 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최고 성적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기적은 거기까지였고, 그 뒤 펼쳐진 스웨덴과의 8강전에선 12-0으로 패배하며 세계 무대와의 격차를 실감하고 말았다. 8강전에서의 좋지 않은 결과에도, 골키퍼 홍덕영만큼은 분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회 이후 첫 올림픽 축구 승리를 이끈 영웅이 된 홍덕영은 스스로 ‘분에 넘치는 출세’를 했다고 여겼고, 찬사와 기대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더 몰아붙이며 노력했다. 이후 그는 조선방직 축구단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대표팀에 소집돼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이끄는 등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주전 수문장으로 자리 잡았다.

 

 

 

#월드컵의 관문, 숙명의 한일전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지역 예선 도전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었다. 당시 국가대표팀의 전력과 대한민국의 국력,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면 월드컵 지역 예선 통과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시아 대륙엔 단 한 장의 출전권이 주어졌고, 이 출전권을 두고 한국과 일본이 격돌하며 역사상 최초의 공식 A매치 한일전이 펼쳐지게 된다.

광복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은 당시의 반일 감정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원칙상 홈 앤드 어웨이로 각각 서울, 도쿄에서 경기를 치러야 함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선수들의 한국 입국을 금지하게 된다. ‘일본인이 한국 땅을 밟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라는 의지일 수도 있겠지만, 정부 입장에선 국내 경기에서 일본에 졌다면 당시 사회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성난 관중들을 통제하기 어려웠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과 홍덕영은 결전을 치르러 일본으로 떠나게 됐다. 떠나기 전 장택상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 ‘진다면 대한 해협에 빠져 죽겠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대표팀의 결의는 엄청났다. 역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일본 땅에서 정식으로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된 도쿄에서의 결전에서, 1차전엔 5-1로 승리를 거두고 2차전엔 2-2로 무승부를 거두면서 대한민국은 최초의 월드컵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고난의 연속이었던 첫 월드컵

가장 중요했던 첫 한일전을 승리하며 월드컵 출전권을 따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대표팀의 앞날은 밝지만은 않았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의 행정력 미비로 인해 개최국인 스위스까지 가는 과정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스위스로 가기 위한 항공권을 제때 구하지 못해 우선 국제선이 발달해 있던 도쿄로 넘어가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야 일본-태국-파키스탄-이탈리아-스위스로 이어지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고, 다른 국가 선수들이 대회 전부터 현지 적응 훈련을 할 때 대표팀은 첫 경기 10시간 전에서야 개최국 스위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상적인 컨디션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첫 상대마저 ‘매직 마자르’라고 불리며 당대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헝가리 대표팀이었다. 전쟁이 멈춘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던 최빈국 대한민국엔 너무나도 가혹한 조 추첨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에이스 페렌츠 푸스카스를 앞장세운 헝가리는 대한민국을 무섭게 난타하기 시작했다. 40~50개가 넘는 유효 슈팅이 쏟아졌고, 점수는 0-9, 한국의 패배로 끝났다. 선수들은 압도적인 실력 차를 실감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외신들과 서양 축구 팬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1차전에서 세계의 벽을 맞이한 대표팀은, 두 번째 상대로 터키를 맞이하게 되지만 전반적인 기량 차이와 체력 저하로 1진 선수들이 상당수 출전하지 못한 악재가 겹쳐 0-7로 패배하며 월드컵을 마무리하게 된다. 경기 전, 터키전을 마지막으로 탈락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런 큰 무대를 다시 경험해 보기 힘들 것이므로, 1진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2진 선수들에게 출전을 양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선수들의 예감대로, 이후 대한민국은 1986년까지 32년간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선수는 바로 골키퍼 홍덕영이었다. 당시 선수 교체 규정이 없던 탓에 장거리 비행과 헝가리의 공세에 지친 선수들은 하나둘 쓰러져 경기 후반엔 7명만이 경기를 뛰는 일까지 벌어졌음에도, 단 9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하며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던 홍덕영에게 경기 후 사인과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감독으로, 국제 심판으로, 멈추지 않는 도전

월드컵 이후에도 홍덕영의 축구 인생은 멈추지 않았다. 홍덕영은 이후 선수로 활약하다가 1958년 이후 지도자로 활동하며 모교인 고려대학교 축구부를 4년간 이끌었고, 그 후 10여 년간 당시 한국의 유일한 FIFA 국제 심판으로도 활약했다.

 

 

 

홍덕영이 은퇴 이후 지도자, 심판으로 활약하는 동안 한국 축구도 1986년 멕시코 월드컵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 이후 계속해서 본선 진출에 성공하며 축구 강국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후배들은 마침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사상 첫 본선 승리와 4강 진출을 만들어내 선배들의 한을 풀었다. 월드컵 최약체 팀이던 대한민국이 세계 축구의 주역이 되는 동안 혈기 어린 도전자에서 어느덧 70대의 노인이 된 홍덕영은 후배들의 활약을 기쁘게 지켜본 후 2005년 눈을 감았다.

 

#Interview

<코너: 홍덕영의 아들 홍기빈 씨 인터뷰>


 


 

Q.1954년 스위스 월드컵, 헝가리전(0-9 패)은 한국 축구사의 아픈 기억이지만 의의가 깊은 첫 도전이었습니다. 아버님은 그 경기를 어떻게 회상하셨는지?

A. 헝가리의 에이스였던 페렌츠 푸스카츠를 회상하시면서, 덩치도 정말 크고, 슈팅도 정말 강해서 공을 막을 때마다 몽둥이로 맞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셨어요. 비가 많이 오니 공이 정말 무거워서 더 힘들어서 기절할 지경이었다고 하셨죠. 경기력이 헝가리에 너무 밀려서, 공이 중앙선을 넘어가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Q. 국제 심판, 감독, 행정가로서의 아버님이 선수 은퇴 이후 축구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A. 아버지는 선수 생활 이후 감독과 국제 심판을 병행하셨습니다. 국제 심판으로 활동하실 땐, 1976년 청소년 대회에서 남북한 대결이 있었을 때 큰 사건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심판위원장으로 계셨는데, 한국과 북한 사이에 판정 시비가 붙었습니다. 거기서 심판 위원장이 자국 편을 들면 스포츠 정신이 훼손되리라 생각하셔서 한국의 편을 들지 않으신 거죠. 이것 때문에 대회가 끝나고 귀국하자마자 조사를 받을 정도로 고초를 겪으셨어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모르셨을 리 없겠지만, 본인의 안위보단 스포츠 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Q. 생전에, 아버님은 축구와 관련해서 어떤 이야기들을 하셨는지?

A. 아버지에게 축구는 거의 종교와 가까웠던 것 같아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지만, 축구와 관련된 부분에선 본인만의 원칙만을 고수하셨어요. 언론에선 축구 감독을 ‘조련사’라는 말로도 많이 표현했는데, 아버지는 그 표현을 무척 싫어하셨어요. 선수들은 다 독립된 인격체고 축구는 선수 개개인이 본인의 인격을 존중받으면서 최선을 다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고, 굉장히 지능적인 운동인데 어떻게 선수들을 동물에 비유하냐는 것이었죠. 스포츠에 대한 원칙에 있어선 매우 진지했던 분이셨어요.

Q. 마지막으로, 기사를 읽을 독자들과 축구 팬들이 아버님을 어떤 선수,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시는지?

A. 아버지뿐만 아니라, 당시 함께 도전했던 선수들도 함께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정도로 배고프고 절망적인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월드컵이라는 엄청난 무대에 무작정 ‘해보겠다.’라는 마음으로 도전했던, 그런 청년들의 모습에 용기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월드컵이 석 달 안으로 다가온 지금, 선수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동시에 한국 축구가 지금의 위치에 올라오기까지 이바지했던 축구 원로분들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의 첫 장면 없이는 ‘클라이맥스’도 존재할 수 없다. 그 첫 장면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최초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과, 자랑스러운 고대인이자 위대한 골키퍼였던 홍덕영 선생님의 이야기가 축구 팬들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고 이어지길 기대한다.

이전글 [전국춘계럭비리그전] ‘완벽하게 꿴 첫 단추’ 고려대, 원광대에 78–18 대승을 거두다
다음글 [SPORTS KU 2026년 3월호] 루마니아에서 생긴 일 (feat.금메달)